[명절 연휴가 꽤 길다]
올해부터 설 연휴에 차례를 지내지 않는다. 작년까지 평생을 명절 연휴에 시골을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했던 터라 명절 연휴에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있는 것이 어색하다. 처가라도 방문을 하고자 주말에 내려갔다가 설 당일부터 막힐까 역으로 다시 집으로 올라가는 것을 택했다.
눈이 많이 와서 그런지 도로에 차가 없다. 공항에는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라는 기사와 사진을 본 터라, 도로의 상황 또한 어색하다. 설 명절 전날인데 오히려 내려오는 차보다 올라가는 차가 많은 상황을 처음 겪어 보지만, 상상했던 것과 반대인 상황이 더 어색하게 만드는 듯하다.
설 명절에 본가를 찾아가고, 차례를 지낸 후 성묘를 다녀오고, 친척들과 왁자지껄 떠든 후 처가로 향해 며칠을 더 보낸 후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일정일 경우 명절이 짧게만 느껴진다. 내려가고 올라올 때 도로에서 보내는 시간도 길고, 설날 당일 전후로 꽉 찬 일정에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그런데, 이번에는 일찌감치 일요일 오후에 내려가 처가에서 시간을 보내고 설 당일 전에 올라오니, 아직도 연휴가 이틀이 더 남은 상황이다. 월요일까지 임시 공휴일이 되니 명절 연휴가 꽤 길게 느껴진다. 직장 생활로 바쁜 와이프는 이번 연휴에 드라마 삼매경이다. 옆에서 보고 있으니 꽤나 여유롭다. 연휴 기간 동안 드라마를 보겠다고 선언을 할 정도이니 그에게 주어진 시간이 꽤 많음을 알 수 있다.
아이를 아침에 등교시키고, 오후 하교 후의 일정이 사라지긴 했지만, 그 사이 시간은 자유로운 시간이기에 연휴 기간에 무얼 하겠다 생각해 본 것이 딱히 없다. 그래서 그런지, 명절 연휴가 따분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명절을 세지 않으면 해외여행을 갈 수 있을 텐데 하며 여행을 떠나는 주위 사람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3시간 전에 공항에 가도 겨우 수속을 마치고 간신히 비행기에 오른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앞으로 설 연휴 기간에는 여행 떠날 생각 자체를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명절 기간 중 친척들이 삼삼오오 모여 함께 고기를 구워 먹으며 시간을 보내지 않으니 먹먹하기도 하다.
매번 일상이었던 상황이 역전되어 반대의 입장에서 겪어보니 부러웠던 모습은 엄두가 나지 않는 상황이고, 왁자지껄 시끄럽고 정신을 쏙 빼놓는 그런 상황이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상황이 된다.
반대의 입장에서 경험을 하게 되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상황이 꽤 다르게 느껴진다. 매사의 모든 일이 그럴 것이다. 내가 바라보고 경험하고 있는 이 상황의 반대편에 섰을 때 다르게 보이는 일이 부지기수 일 것이다.
불과 몇 개월 전의 나의 모습을 돌이켜 보면 죽을 것 같이 힘들었던 시기지만, 반대편에 서서 봤더라면 간과하고 놓치고 있던 것들이 보이는 시기였을 수 있겠다 싶다. 그러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기에 힘든 시기가 찾아왔던 것이고, 그런 부분을 다시 생각하고 바로잡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세상을 바라볼 때 바라보고 있는 방향의 반대를 비롯해 360도를 두루 둘러볼 수 있는 능력, 즉 통찰력을 지닌다는 것은 매우 대단한 일이다. 경제적인 여유와 시간의 여유 두 가지가 반드시 필요한 대목이다.
설 연휴를 쇠지 않으며 긴 시간을 지내다 보니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Snow Angel]
부모님께서도 설 명절 연휴에 시골집에 내려가 계시질 않다 보니 내려갔다 올라오는 길에 시골집을 들러 이것저것 챙겨 오기를 주문하셨다.
시골집 대문을 여니 간밤에 내린 눈이 소복이 쌓여있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밟는다는 것은 매우 설레는 일이다. 조심스레 한 발자국씩 앞으로 내어가며 나아갈 때 뽀드득하고 들리는 소리까지 기분이 좋아지게 만든다.
이것저것 주문한 것들을 챙겨 차로 돌아오니, 아이가
"아빠, 나 할아버지 집에 들어가고 싶어. 엄마가 내려서 놀고 와도 된대요."
"눈이 20cm 넘게 쌓여서 발이 빠질 텐데. 옷 다 젖을 텐데."
"괜찮아요. 엄마가 놀고 와도 된댔어. 아빠~"
"10분만 놀고 오라고 해요. 엄마가 10분 알람 해두고 시간 다 되면 아빠한테 전화할 테니까 가서 놀고 와."
"거봐. 아빠~ 나 내려도 돼요?"
"그래. 가자. 내려."
아이는 문을 열고 들어가 보이는 광경에 눈이 번쩍인다. 내가 최소한으로 눈을 밟아두었기에 사방에 아직 밟지 않아 소복이 쌓인 눈을 바라보며 '이걸 내가 다 밟을 테야!'라는 기세로 소리를 지르며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장화를 신고 오지 않아 발아 푹푹 빠지고 옷과 양말에 금세 눈이 덕지덕지 붙지만 아랑곳하지 않는다.
폴짝폴짝 토끼가 된 양 뛰어보기도 하고, 강아지처럼 엉덩이를 연신 흔들어 대며 즐거움을 표출한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아이의 옷가지가 젖고 더러워지는 것을 걱정하던 나는 오히려 아이에게 이곳저곳을 다 밟아보라고 주문하며 해맑게 뛰어노는 광경을 놓칠 새라 동영상을 찍기 시작한다.
"저쪽에 아직 밟지 않은 눈이 많아. 얼른 달려가 봐!"
"이쪽에서 그거 한 번 해봐. Snow Angel. Snow Angel 알지? 책에서 봤잖아. 눈에 벌러덩 누워 발 다리를 파닥 거리는 거. 오늘 아침에 '벌러덩' 알려줬지? 그거 한 번 해보자!"
"응, 알아. 알겠어. Snow Angel!"
아이는 넓은 자리로 옮기더니 뒤로 벌러덩 하고 누워서 팔과 다리를 파닥 거린다. 바닥 잔디에 옷을 비벼 누렇게 변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낄낄대며 그 광경을 카메라에 담는다.
아이를 모델로 하여 시골집 사진을 담아본다. 평소 별것 아닌 듯한 곳이 멋진 배경이 된다. 눈까지 소복이 쌓이니 꽤 운치 있고 멋있다.
집으로 올라와 부모님과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 아버지께서 강조하신다.
"아이들이 눈을 밟고, 쌓인 눈에 벌러덩 누워 쌓인 눈을 직접 느끼고, 그렇게 놀면서 행복함을 느낀 경험을 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야. 부모가 아이가 다칠까, 옷이 더러워 질까 염려로 아이가 그러한 경험을 하지 못하게 막는 것은 오히려 경험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는 거지. 아이가 행복함을 느끼며 논 기억을 갖는 것이 훨씬 값진 경험이잖아. 아까 눈 밭에서 뒹군 기억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기억이야. 영상에 담긴 모습만 보더라도 행복함이 고스란히 전달되잖아."
아이가 차에서 내려 놀고 싶다고 할 때, 내가 안된다고 저지를 했더라면 오늘 아이가 느꼈을 행복함과 좋은 추억을 빼앗았을 것이다. 부모로서 아이를 안전하게 보호하는 것이 필요하겠지만, 반대로 아이가 경험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빼앗을 수 있는 양날의 검을 지니고 있기에, 항상 판단함에 있어 신중함을 기할 필요가 있다.
정리를 하면서도 아까 아이의 행복한 표정을 잊을 수 없다. 하얀 눈을 바라보며 '저 눈을 내가 제일 처음 밟을 거야'라고 상상하며 설레고, 눈을 밟고 뒹굴며 세상 모든 것을 가진 듯한 그런 표정을 짓는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며, 아이가 밟기 전 정말 아무도 밟지 않은 그곳을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했던 내가 떠오른다. 자칫 내가 기회를 빼앗아 그러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할 수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반성하게 된다.
눈 밭에서 팔과 다리를 파닥거리는 모습을 Butterfly가 아닌 Angel이라 부른 이유를 알겠다. Snow Angel의 모습을 보이는 아이가 그냥 천사다. 세상 아름답고 예쁘다.